1900.08.25 독일철학자 니체의 사망
독일의 철학자. 생(生)철학의 대표자로 실존주의의 선구자, 또 파시즘의 사상적 선구자로 말해지기도 한다.
본 대학을 거쳐 스위스의 바젤 대학 교수직(1869~1879)을 그만두면서부터 고독한 생활을 하다가 정신이상으로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종래의 합리적 철학, 기독교 윤리 등 모든 종래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철저한 니힐리즘(nihilism)을 주장하여 생(生)의 영겁회귀(永劫回歸) 속에서 모든 생의 무가치를 주장하고, 선악의 피안에 서서 '약자의 도덕'에 대하여 '강자의 도덕'을 가지고 '초인'(超人)에 의해서 현실의 생을 긍정하고 살아야 함을 주장했다.
이 사상 속에는 생물진화론의 생존투쟁의 사고가 존재하고 있음과 동시에,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진행해 가는 19세기 말의 사회상태를 반영하여, 노동자 계급의 격렬해져 가는 공세 앞에서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종래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대신하여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제창하였으며, 사회주의를 '노예도덕'으로 간주하고 지배계급의 독재지배를 '군주도덕'으로 높이 내걸어 '권력에의 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었다.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39 )
유럽 문명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신은 죽었다'
니체의 할아버지는 카톨릭교의 주교에 해당하는 루터 교회의 감독관이었으며, 아버지 칼 루드비히 니체는 작은 마을의 목사였다.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는 루터 교회 목사의 딸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이 일종의 반항처럼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또 다른 전기적 해설은 니체가 가풍에 충실한 아이였으며, 아버지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보였다고 진술한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어린 니체에게 충격을 주었고, 니체의 여정이 유사아버지를 찾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가령, 니체와 바그너의 기묘한 관계가 상징적인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은 죽었다.”라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공격이나 논박이 아니라 서구의 지성사를 꿰뚫는 선언인 동시에 유럽 문명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것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의 죽음을 설명하는 한 대목을 음미해 보자. “사람들은 부처가 죽은 후에도 수세기 동안 그의 그림자를 동굴에서 보여주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이 지금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신의 그림자가 떠도는 동굴들은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자 역시 정복해야만 한다.” 니체의 이 말은 그가 특정한 종교를 공격하려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플라토닉 삼각관계로 맺어진 루 살로메와 파울 레. 니체(왼쪽부터.1882년)
니체의 개인사적 스캔들로 가장 유명한 것은 바젤 대학의 동료였던 철학자 파울 레와 그가 소개한 루 살로메와의 삼각관계이다. 레는 살로메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 당하고, 플라토닉한 삼각관계를 형성하자는 살로메의 요청에 따라 니체를 끌어들이게 된다. 그런데, 니체가 살로메에게 청혼을 하면서 이들의 삼각관계는 종결이 된다. 이들의 사연은 호사가들의 재밋거리로 자주 거론되면서, 여러 작품과 상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스탠포드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인 어빈 얄롬이 쓴 소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는 살로메가 니체를 위해 프로이트의 스승인 브로이어 박사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지만, 이 소설은 허구를 통해 니체를 정신 분석해 보는 흥미로운 상상의 소설이다).